내가 나를 믿는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아주 강하게 다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생각은 왠만하면 다르다. 문제는 내가 조금이라도 인정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이다.
나는 이런 것에 매우 취약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어느 정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두고, 기대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혼자 실망하고 손절하는 식이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의아한 일이다. 딱히 손절한 사실을 알리지는 않기 때문에, 의아할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그렇게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 이게 그냥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그런 결과 말고… 애초에 스스로가 너무 쉽게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나랑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마치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굉장히 불필요한 사고의 확장 방식인 것 같다. 애초에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좀더 물러나서 생각할 때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에게도 실망스러운 점이 공존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나는 모두에게 실망하고 만다. 그것은 결국 인류에 대한 실망으로 나아가므로, 몹시 귀찮은 생각의 흐름에 빠져들게 된다.
사람이 제일 솔직한 것은 혼자 있을 때
유재석 씨가 어딘가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제일 솔직한 것은 혼자 있을 때고, 그 혼자 있을 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정말로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했는가.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그런 것 같지 않다.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뭔가가 남아 있는데 하지 않았다던지 그런 게 아니다.
주어진 것 말고, 주어진 것을 포함해 그보다 더 큰 단위헤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 정말로 해봤는가?
특정한 업무를 어떻게 하는가를 배우는 일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맞춰서 할 때, 시간에 정말로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느껴지는 시간의 표정이 있다. 희망섞인, 우직한, 숨죽인 응시.
시간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뭔가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마주한 시간들은 내가 꿈꾸던 그런 시간들이 아니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냉정하게 물러나야 할 문제가 있고, 심지 굳게 지켜야 할 문제가 있다.
지켜야 할 문제에서 물러난다면 시간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물러나야 할 문제에서 고집을 부리면 시간은 화난 표정을 짓는다.
시간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어서는 안 된다.
7월 5일은 셋 중에 하나만 틀렸다.
7월 5일을 보내고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맞았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도 맞았다. 아무도 이걸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저, 사는 데 있어서 여기에 7월 5일에 오는 것이 내 인생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 걸 왜 해? 하는 말에 숨은 것은, 그게 네 인생을 해결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어? 라는 질문이다.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응원을 받았다. 맞다 틀리다의 관점에서는. 다만 그런다고 나의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은 틀릴지 모른다는 것을 넘어서 진심으로 세상에 마주하는 자세가 되어야만, 결국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도 쉽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살아야 한다. 내가 남을 살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 나를 살 것인가.
문제가 섞여 있으므로 간단하지 않다. 나는 어떻게
-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
- 다른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렇게 3가지다.
즉,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그 돈을 버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은가.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3가지는 하나라도 과락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 다 완벽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챙겨야 한다.
모든 걸 열어놓고 결국 이것의 결론을 내야 한다.
하루 이틀 이걸 붙잡고 앉아있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가치에 대하여
나한테 가치있는 것,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것.
빨래에서 냄새가 나길래, 그 냄새가 뭐때문에 나는지 찾아봤다.
습기가 많아서 그렇다 천천히 말라서 그렇다 그런 거 말고, 균의 이름이 뭔지 찾아봤다.
모락셀라 오슬로엔시스라고 한다.
피지나 각질 등 단백질을 먹고 산다고 한다. 단순히 세탁으로는 쉽게 죽지 않고, 물을 통해 다른 세탁감에도 전염된다고 한다.
해결하려고 하니, 산소계 표백제를 넣어서 세탁을 하면 된다고 한다.
…이런 게 너무 신기해서 블로그 글을 신나게 썼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그냥 빨래에서 냄새가 나면 옥시크린 넣으면 된다는 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파인만 씨의 글을 봤다.
http://genius.cat-v.org/richard-feynman/writtings/letters/problems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 – 리처드 파인만
토모나가의 제자이기도 했던 한 옛 제자가 파인만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이에 파인만은 마노 씨에게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코히런스 이론을 연구하고 있으며, 난류 대기를 통과하는 전자기파 전파에 일부 적용하고 있습니다… 다소 겸손하고 현실적인 문제지요.”
친애하는 코이치,
당신에게서 소식을 들으니 정말 기뻤고, 또 지금 연구소에서 좋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조금 아팠습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슬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스승의 영향으로, ‘가치 있는 문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진짜 가치 있는 문제란, 우리가 실제로 풀 수 있거나,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가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 — 그런 것이야말로 과학에서 위대한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내 생각엔, 당신이 말하는 그런 ‘겸손하고 현실적인’ 문제보다 훨씬 더 단순한 문제들을 택하길 권하고 싶습니다.
아주 사소하더라도, 당신이 정말로 풀 수 있는 문제부터 시작하세요.
그렇게 하면 작은 성공의 기쁨, 그리고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컨대 당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동료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일이죠.
단지 ‘가치 있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에, 그런 즐거움과 보람을 스스로 빼앗아선 안 됩니다.
당신이 나를 만났을 때는 내가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고, 당신 눈엔 내가 무슨 ‘신에 가까운’ 문제들을 다루는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다른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알버트 힙스는 바람이 바다 위에서 어떻게 파도를 만들어내는지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받아들인 건, 그가 직접 풀고 싶은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과는 실수가 있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문제를 ‘지정해줬고’, 그로 인해 당신은 어떤 문제를 흥미롭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었죠.
(즉, 자신이 뭔가 해볼 수 있다고 느껴지는 문제들이야말로 정말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이 편지가 그 오해를 조금이나마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당신이 ‘겸손한’ 문제라고 부를 만한 수많은 문제들을 다뤄 왔습니다.
그중 일부는 겨우 부분적인 성공만 거뒀지만, 그래도 나는 늘 즐겁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
-
매우 매끄럽게 연마된 표면의 마찰계수를 실험해보고 마찰이라는 현상에 대해 뭔가 배워보려 했던 일 (실패했습니다).
-
결정체의 탄성 특성이 원자 간 힘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
-
금속 도금을 플라스틱(예: 라디오 다이얼) 표면에 잘 붙게 만드는 법.
-
우라늄에서 중성자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
유리에 코팅된 막이 전자기파를 어떻게 반사하는지.
-
폭발로 발생하는 충격파.
-
중성자 검출기 설계.
-
어떤 원소들은 L 오비트의 전자를 포획하지만 K 오비트의 전자는 왜 안 되는가.
-
종이를 접어 아이들 장난감(플렉사곤)을 만드는 일반적인 이론.
-
경핵(light nuclei)의 에너지 준위.
-
그리고 수년간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난류 이론.
-
물론, 양자역학의 “더 거창한” 문제들도 있죠.
우리가 정말 뭔가 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도 너무 사소하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죠.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아내에게, 아이에게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의 동료들이 당신 사무실에 들어와 질문했을 때, 그에 답해줄 수 있다면 그들 사이에서도 곧 중요한 사람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도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조차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요.
당신이 지금 세상에 있는 자리를, 제대로 인식하세요.
자신을 평가할 땐, 어린 시절의 순진한 이상이나, 스승이 바란다고 잘못 짐작하는 이상에 기대지 마세요.
행운과 행복을 빕니다.
진심을 담아,
리처드 P. 파인만
이 글은 연구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메이커, 개발자, 그 밖에 무엇이든 앞으로 어떤 것들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도 충분히 울림이 있었다.
세탁물에서 냄새가 나는 것의 원리를 알고 그걸 재발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재밌고 보람있는 일이다. 꼭 무슨 엄청난 비결을 이야기하거나 깜짝 놀랄 만한 것들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기준만을 따르려고 하다가 공허하고 위대한 꿈의 흔적만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커피 한 잔처럼, 모락셀라 균처럼.
더 현실에서, 더 직접적으로 보람된 일을 하자.
백일몽
취직 전, 카페 다니기를 좋아했었다.
개발자로 일하고 몇 년이 지나기 시작하면서 바리스타라는 직업을 동경했던 것 같다.
커피는 어쨌든 세상에 확실한 가치를 한 잔 제공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개발은 유저에 가닿지 않으면 만질 수 조차 없는 백일몽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또 오랫동안 나는 유저에게 가닿지 못한 개발자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나는 유저가 있는 서비스를 지난 몇 년동안 운영해보지 못했다.
충격적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충격적이다.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낸 것인가.
개발자가 맞기나 한 것인가.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
7년동안이나 백일몽을 꾼 셈이다.
깨어날 때가 됐다.
Belief
새가 가지에 앉을 때 가지의 튼튼함을 믿는가, 혹은 자신의 날개를 믿는가.
모든 시작에는 믿음이 있다. 믿음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믿지 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아니라면 무언가를 하는 데 적어도 어느 정도는 믿어야 한다.
예컨데 현상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괜찮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안감은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시도하고 왜 틀렸는지를 배우면서 없애나가는 것이다. 아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불안은 항상 존재하는 채로, 하는 일에 대해 미소지을 수 있을 정도로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미움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퍼트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불안의 이유로 나를 못 믿는 것도 있지만 외로운 것도 있다. 누군가가 응원을 해준다면 힘이 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에 기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된다. 멀리 있는 사람이 해주는 응원으로 힘을 내자.
세상에 내가 믿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로 힘을 내자.
돈 이야기에는 저마다 한 마디씩을 하고 싶어한다. 돈 얘기만큼 돈 되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정보는 정보로써 받아들이되, 휩쓸리지 말자.
민물 장어와 힘찬 연어, 그리고 백만 송이 장미
어느 정도 주기로 다시 듣곤 하는 음악이 있다.
하나는 “민물 장어의 꿈"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를 깎고 깎는 사람이, 바다에 닿으려는 민물 장어에 자신을 태워 부른 노래. 마왕의 말들은 항상 위로였다. 그리고 그 위로를 그리워하면서 어떻게든 아직 남은 생을 열심히 걷는 후배들의 그리움도 항상 위로가 된다. 비극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를 준다. 슬프지만 자유롭기에 괜찮고, 자유롭지만 슬프기에 아름답다.
하나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다. 자기를 알고 납득하기 위한 삶이 아닌, 어떤 신비한 연유를 통해 운명처럼 만나게 된, 굽이굽이 돌아가야 하는 끝없는 길에 놓인 사람. 그 사람이 여정에서 만나는 길가의 꽃밭과 부서진 햇살을 보고 미소짓는 곡이다. 규명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는 것이고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웃어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곡이다.
하나는 “백만 송이 장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백만 송이의 꽃을 피워야 한다.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이다.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을 피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결국 백만송이 꽃이 피워지는 날 고향 별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외계인처럼 여겨도 좋다. 사랑을 사명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사명을 지고 완수해냈을 때, 그리운 곳으로, 사랑이 충만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사랑을 꽃피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곡이다.
나를… 어떤 시점마다 살게 하거나, 넓게 하거나, 단단하게 하는 곡들이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다는 것
뭔가 떠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일이 있다. 특히나 월요일 아침이 그렇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나는 거기에 던져져서 휩쓸려가는 것 같다.
아마 목적 지향적인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서다. 일을 하면 일 안에서 목적을 지향하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어떤 목적도 없이 유유자적할 때가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점에도 그런 면이 있다. 생각을 아무리 하더라도 어딘가에 써서 글로 옮기지 않으면, 그 생각은 둥둥 떠서 어디론가 가 버린다.
물론 쓴다고 해서 사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실제로 사는 일은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글로 쓰는 것은 행동을 일부 한 것 같은 만족감을 제공하므로,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아무 것도 안하고 둥둥 떠나가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행동을 바로 해버리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없다면, 쓰기라도 해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자세를 고쳐앉고, 정신을 부여잡고, 실제로 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자.
생각을 믿는 것에 대해서
타츠키 료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꿈에서 미래를 본다고 한다. 예전에 다른 것을 맞춘 일이 있어서 유명해졌다. 그 이후 다른 예언을 했는데 그것이 올해 2025년 7월 5일이다. 이때 대만과 홍콩과 인도네시아가 하나로 이어지고, 해일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객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굳이 그 시점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글을 읽거나 관련된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7월달에 일본에 가면 덥지 않겠냐. 정도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때 떠올랐다. 비행기도, 숙소도. 쌀 거 같다. 누가 그때 가겠는가, 굳이 그때. 그런데 왠걸, 들어가보니 그래 보이진 않았다. 비행기는 뭐 적당히 싼 거 같기는 한데, 숙소는 글쎄… 이게 싼 게 맞을까 싶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가기로 했다.
대만과 홍콩과 인도네시아가 육지로 연결될 정도의 충격이라는 건, 생각하기에 그 근처에만 안가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공룡이 멸종하던 그 운석 충돌은 직경 15km의 운석이 충돌한 사건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지구 전체의 숲이 불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타츠키 료의 꿈에서, 그 충격에 의해 서일본이 사라지고, 일본인의 3분의 1이 죽으며, 일본인들은 모두 동북쪽으로 올라가 살게 된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왜냐 하면 직경 15km의 운석이 지금 다시 떨어져도 대만과 홍콩과 북부인도네시아가 연결되는 건 턱도 없다. 그정도 가지고는 안된다. 적어도 2배 내지 3배의 운석이 필요하다. 전 지구인이 미쳐서 갑자기 정확히 그 지점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핵폭탄을 발사해도 그렇게는 안 된다.
자 그렇다면 남는 것은 난카이 대지진이다. 딱 소름끼치게 그날 일어나는 일이다. 자… 이제 그냥 황당하다. 오케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심지어 일어난다 하더라도 후쿠오카를 한정으로 했을 때 지난 지진에서는 진도 3정도로 끝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 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내가 내 삶을 산다는 것은 내 판단을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는 일, 즉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준비하는 일에 너무 오랜 시간을 썼다. 80년을 기준으로는 절반을 쓴 셈이다. 이제부터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겠다. 그동안 낭비한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다.
고쳐앉기
한동안 집에서는 생산적인 활동을 잘 못했다. 회사에서만 일을 하고, 집에서는 순수하게 쉬기만 했다. 그래서 주말에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고 했을 때도, 핫데스크 같은 걸 빌려서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조금씩 집에서도 꾸준히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집에서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참 시작하기가 어렵다. 나는 뭐든 시작을 해놓으면 그 안에서 하고 싶은 게 보이고 또 보이는 식으로 계속 스스로의 동력으로 앞으로 나가는 성격이다. 시작을 안하면 무한정 논다. 노는 것도 스스로 놀 걸 찾아서 무한히 진행한다.
그러니 한번만 시작하면 된다. 그 시작이 어려운데, 의외의 곳에서 힌트를 얻었다.
원래 내 책상 아래에는 발 받침 대용의 수납 겸용 의자 같은 가구가 있었다. 약간 안락의자와 함께 딸려 오는 정도 높이의 의자다. 거기에 다리를 올리면 다리가 쭉 뻗은 상태가 된다. 그러면 허리는 뒤로 기대게 되고, 자동으로 반쯤 누워 버리게 된다.
그러면 맥이 탁 풀린다. 유튜브나 뒤적거리면서 뭘 하고 놀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 다리받침이 합판 같은 걸로 만들어진 거라, 약해서 여기저기 삐걱거리고, 내부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않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얼마전에 이걸 한번 들어내서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은 끌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더 낮은, 다른 책상에 있던 사무용 발받침을 놓아 보았다.
자세가 달라지니, 시작하기도 쉬워졌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도 옷을 갈아입고 의식적으로 ‘출근’이라는 것을 한다고 했고, 그런 내용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계기를 만들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아는 것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생활을 바꾸어 봐야겠다.
언제나 뭔가를 알아가는 것을 나는 재미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실제로 그 알아낸 것들을 어딘가에 실제로 부딪혀보지는 않는 일이 많은 것 같다.
항상 무언가 미래에 올 삶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무한히 준비만 하는 삶. 요즘은,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지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이 그때다. 지금이 아니면 없다. 지금이 바로 삶의 순간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